이산주역

사주디자인

사주명리학/천간

「사주팔자」 나는 누구인가? (乙木)

이산(頥山) 2023. 6. 18.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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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피지기 백전백승

아래 도표에서 사주팔자 여덟 글자 중에 나를 상징하는 것은 일간 을목(乙木)입니다.
다른 7개의 글자는 내가 지구에 태어나 관계를 맺고 있는 기운이죠.
나는 그들과의 관계에 의하여 규정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乙木 혼자서는 나라고 하는 존재를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굉장히 복잡한 관계의 설정을 통하여 만들어진 복잡다단한 존재입니다.

갑목(甲木)은 양기(陽氣)로서
땅을 뚫고 자라나는 새싹같이
혈기가 왕성하여 굽힐 줄 모르는
청년 같은 감성적 성정의 소유자라면,
 
을목(乙木)은 음기(陰氣)로서
성숙한 큰 나무를 상징하며,
바람에 굽힐 줄 아는 유연성과 부드러움,
비바람을 경험한 원숙(圓熟)함,
타협이 가능하고 합리적이며
이성적 성향의 소유자를 말합니다.
 
을목은 가지를 늘어뜨린 성숙한 나무이며,
때에 따라 담을 타고 넘어가는
담쟁이덩굴 같은 성정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을목을 주역의 괘상으로 표상하면
손풍巽風☴이 됩니다.
만물이 왕성하게 성장하는 봄의 기운을 상징하죠.
땅(초음)에 뿌리를 두고 양기가 상승 확장하는 자유분방한 기운을 의미합니다.
격식이나 관습에 얽매여 정신이나 행동이 구속되는 것을 싫어하죠.

부드러운 바람처럼 피해가고
담쟁이 넝쿨처럼 굽히며 넘어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정면으로 부딪히고
넘어트리는 태풍 같은 강한 기질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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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목이 경험이 미숙한 청소년 같은 성정이라면
을목은 사회에 나가 산전수전을 경험하고 있는
청년 같은 성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갑목이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고 무조건 직진하려는 철없는 성정이라면
을목은 비바람은 피하면서
시의적절하게 몸을 숙일 줄 아는 철이 든 성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막힌 곳은 피해가고 굽힐 줄 아는 부드러운 성정,
타협할 줄 아는 유연성,
뻗어가려는 기상과 부드러운 굴신의 성질을 함께 가지고 있는
강인한 기질의 소유자라 할 수 있습니다.
외면적으로는 부드럽고 합리적이지만
내면적으로는 타협할지언정 꺾이지 않는 기상도 있구요.

와, 그렇다면 갑목보다 을목이 훨씬 더 멋지네요.
아닙니다.
모든 것은 주변의 나머지 7개의 간지와의 상관성에 의하여 설정되기 때문에 그 의미는 상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직진해야 할 때 머뭇거리거나,
잠시 멈추어야 할 때 그대로 직진한다면
내게 이로운
시의적절한 행동라고 할 수는 없겠죠.
 
사주팔자, 즉 명리학이란
일간(나)을 중심으로 다른 여타 7개 간지와의 상호관계를 분석하여
일간인 나의 인생길에서
어떤 선택을 함에 있어
길흉 득실을 따져 피흉추길(避凶趨吉)을 하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경제학, 경영학, 통계학 등등 대부분의 학문은
인간이 경험하고 누적해온 다양한 분야를 분석하고 통계를 냄으로써
인간이 미래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도움을 주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시공간적 한계에 갇혀있는
생물학적 인간에 대하여
피흉추길을 목적으로 하는
미래 예측에 관한 학문은
공식적으로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래 예측은 비과학적이라고 치부하여
종교적 영역이라는 울타리에 가두고 있기 때문이죠.
 
지금은 현대물리학인 양자역학에서 초미세 영역이 연구, 새로운 발견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양자물리학은 물리(物理)를 말하기보다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설명으로 가득하죠.
종교적 신(神)의 전매특허인 창조 영역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노자(老子)의 무(無),
정이(程頤)의 리(理),
장재(張載)의 기(氣)
라는 동양철학적 용어들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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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유사한,
아니 인간보다도 더 우월한 AI가 인간의 영역을 대체해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얼마전 애플에서 나온 제품은 이제 눈빛으로, 생각만으로도 동작을 실행하고 제어합니다.
사실 무선전화기, 인터넷, TV 등등 현대과학의 산물들은
예수가 바다 위를 걸은 기적에 못지않은 것들이죠.
 
이제 기적의 영역은 현실로 과학으로 이미 곁에 다가와 있습니다.
무지의 영역을 신에게 위임하고 무한이라고 칭하며
애써 외면하는 것은 현대 지식인의 자세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당이 날카롭게 벼린 작두 칼날 위를 걷는 것은
이제 신비라고도 할 수 없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손에는
요술공주 세리의 요술봉보다 더 효능 있는 핸드폰이 쥐어져 있습니다.
말로 명령하면 곧바로 알아듣고 실행합니다.
앞으로 더욱 세련되고 업그레이드된 
요술봉으로 더 많은 기적을 현실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역이 미신이라고요?
명리학이 비과학적이라니요.
인간의 경험과 예지력이 결집된 인류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누적된 경험과 자료의 분석을 통해서 미래를 예측하려는 것은
생로병사라는 시공간의 한계에 갇혀있는 인간으로서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무지에 대해 생각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이지 죄가 될 수 없습니다.

 
만난 적도 없는 신(神),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본 적도 없는 신(神)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그것이 마치 지혜로운 지식인인양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물론 자신이 믿고자 하는 것을 믿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것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무지의 영역에 대하여 당당히 질문을 던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죠.
그것은 죄의 영역이 아닙니다.
 
“자신의 한계와 무지를 알지만
지식의 원천을 다른 것들에게 위임하려 하지 않는 당당한 외침,
그것은 무한에 맞서는 작고 신중하며 더없이 지성적인 선언,
몽매주의에 반대하는 선언입니다.
 
광대한 우주이지만 유한합니다.
오직 우리의 무지만이 무한할 따름입니다.
 
우리의 무지를 직시하고 받아들여 그 너머를 보려고 하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쪽이 더 멋진 일입니다.
무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미신과 편견에 빠지지 않는 길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진실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가장 정직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카를로 로벨리의 말입니다.
 
양자물리학자인 카를로 로벨리의 다음 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하는 물음에 대해서,
 
“깊은 신비를 조사하려는 너 같은 자들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다.”
 
라고 다소 농담조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들었던 지식을 내려놓고,
에덴동산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산頥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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